간호사 제니할매 이야기 ' 죽기 전에 꼭 버려야 할 세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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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버려야 할 세 가지
미국 방문간호사가 삶의 마지막 곁에서 배운 것
“제니 씨, 사람은 죽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해요?”
가끔 환자분들이 제게 묻습니다.
유언장을 써야 하는지, 재산을 미리 나누어야 하는지, 장례 절차를 정해두어야 하는지를 물으십니다.
처음에는 저도 현실적인 준비부터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문간호사로 일하며 수많은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뒤로는 대답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삶의 끝에서는 무언가를 더 챙기는 일보다, 평생 마음에 지고 살았던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일이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환자들의 집에서 제가 본 것은 돈이나 재산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오래 품어 돌처럼 굳어버린 미움, 끝내 건네지 못한 말, 그리고 좋은 날을 기다리느라 사용하지 못한 삶이었습니다.
60년 전 그 여자를 아직도 미워합니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의 혈압을 재던 날이었습니다.
혈압계가 팔을 조이기 시작하자 할머니가 갑자기 시누이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 여자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처음에는 얼마 전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무려 60년도 더 지난 일이었습니다.
젊은 며느리였던 할머니에게 시누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잊어.”
할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입술이 떨리고 얼굴까지 벌게졌습니다.
저는 혈압계 화면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여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세요?”
할머니가 잠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죽었지. 벌써 오래됐어.”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미움의 주인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60년 전 그날의 화는 할머니 가슴 안에서 조금도 늙지 않은 채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용서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상처를 다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다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오래전에 떠났는데, 아직도 할머니 마음속에서 방 하나를 차지하고 계시는구나.’
혈압계의 숫자는 평소보다 높았습니다. 할머니는 소매를 내리면서도 한동안 그 시절 이야기를 멈추지 못했습니다.
그날 현관문을 나서는데, 제 간호 가방보다 할머니의 마음이 훨씬 무거워 보였습니다.
“한 번만 더 안아줄 걸…”
남편을 먼저 보낸 또 다른 할머니의 침대 옆에는 젊은 시절 부부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진 속 남편은 훤칠했고, 할머니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수줍게 웃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참 잘생기셨네요.”
제가 말하자 할머니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살아 있을 때는 저 사람이 그렇게 미웠어.”
남편은 무뚝뚝했고 할머니는 성격이 급했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다툼이 되고, 작은 서운함이 며칠씩 냉전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상하게 싸웠던 일보다 다른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버스정류장에 나와 있던 남편.
아픈 아이를 등에 업고 밤새 거실을 서성이던 모습.
생활비가 든 월급봉투를 말없이 식탁 위에 내려놓던 거친 손.
할머니가 손끝으로 사진 속 남편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습니다.
“마지막에 병원에 있을 때 한 번만 꼭 안아줄 걸 그랬어.”
그리고 아주 작게 덧붙였습니다.
“그때는 내일도 있는 줄 알았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에게도 대답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은 순간이 있습니다.
창밖에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들렸습니다. 할머니의 손은 여전히 사진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따뜻한 포옹도 내일 할 수 있을 것 같아 미룹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되고, 남겨진 사람에게는 하지 못한 말이 평생의 문장이 됩니다.
아까워서 한 번도 입지 못한 옷
참 알뜰하게 사셨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젊은 날부터 쉬지 않고 일하며 돈을 모았고, 물건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습니다.
세일할 때 예쁜 옷을 사두어도 좀처럼 입지 않았습니다.
“이건 특별한 날 입을 거야.”
반짝이는 접시도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습니다.
“귀한 손님 오면 써야지.”
포근한 새 이불도 비닐을 벗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오지 않은 특별한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입원했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가족들이 집을 정리하던 날, 저도 그곳에 들를 일이 있었습니다.
옷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블라우스가 여러 벌 걸려 있었습니다. 찬장 안의 접시는 새것처럼 반짝였고, 좋은 이불은 비닐 속에 얌전히 접혀 있었습니다.
모든 물건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물건들은 하나도 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끼던 사람만 그곳에 없었습니다.
저는 옷장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아끼며 사는 것과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은 생각보다 가까이 붙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은 점점 작아집니다
방문간호사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벽에는 자녀들의 졸업사진이 걸려 있고, 서랍에는 빛바랜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옷장에는 젊은 날의 옷이 걸려 있고, 진열장에는 평생 모은 물건들이 놓여 있습니다.
어떤 집에는 값비싼 가구가 가득하고, 어떤 집에는 낡은 의자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은 점점 작아집니다.
처음에는 집 전체가 필요합니다.
몸이 약해지면 거실과 침실이면 충분해지고, 조금 더 아프면 침대 하나가 세상의 전부가 됩니다.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 하나만 있어도 충분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저도 제 삶을 돌아봅니다.
이미 지나간 사람에게 아직 화를 내고 있지는 않은지, 해야 할 말을 자꾸 다음으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좋은 날에 쓰겠다며 오늘의 기쁨을 옷장 깊숙이 넣어두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간호사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내려놓지 못한 마음이 많고, 미루어둔 말이 있고, 아까워서 사용하지 못한 물건이 있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어느 빈방에서 배운 것
한 환자분이 세상을 떠난 뒤, 마지막 방문 기록을 정리하기 위해 그 집에 다시 간 적이 있습니다.
늘 환자분이 누워 계시던 침대는 비어 있었습니다.
침대 옆 탁자에는 반쯤 마신 물컵과 제가 지난번 방문 때 정리해드린 약통이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창문으로 오후 햇살이 들어왔습니다.
집도, 가구도, 물컵도 그대로인데 사람만 없었습니다.
그 빈방 앞에서 문득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마지막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요.
통장도 두고 가고, 집도 두고 갑니다. 아끼던 옷과 좋은 그릇도 모두 남겨둡니다.
그렇다면 오래된 미움까지 꼭 움켜쥐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할 수 있는 말은 오늘 해버리고, 보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전화하고, 아껴둔 옷도 그냥 꺼내 입으면 어떨까요.
좋은 접시에는 거창한 요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김치찌개를 담아 먹고,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 나누면 그것으로 충분할지 모릅니다.
그날 빈집을 나오며 뒤를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창가에 내려앉은 햇살이 참 좋았습니다.
문득 아까워서 입지 못했다던 할머니의 새 블라우스가 떠올랐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옷 한 벌을 꺼냈습니다.
특별한 날 입으려고 아껴둔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옷을 입을 이유는 이미 충분했습니다.
오늘도 눈을 뜨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따뜻한 밥을 먹으며 살아 있으니까요.
오늘 살아 있다는 것보다 더 특별한 날이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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