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제니할매 이야기 '변방의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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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고수
미국 방문간호사가 시니어 아파트에서 만난 인생의 숨은 고수들
시니어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낯설지 않은 멜로디였습니다.
Can’t Help Falling in Love.
1층 휴게실 한쪽에 놓인 오래된 피아노 앞에는 백발의 할머니가 앉아 있었습니다.
등은 조금 굽었고 손등에는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습니다.
손가락도 젊은 사람처럼 빠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건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는 나이가 없었습니다.
띵….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한 음.
또 한 음.
우편함을 열던 할아버지가 손을 멈췄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할머니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케어기버 한 사람은 지나가다 벽에 기대어 섰습니다.
누가 박수를 치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 곡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작은 박수가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뜬금없이 옛날 무협지가 생각났습니다.
강호의 고수는 산속에 숨어 있다
어린 시절 무협지를 읽다 보면 별별 고수가 다 나옵니다.
천하제일검.
무림맹주.
검 한 번 휘두르면 대나무 숲이 우수수 쓰러질 것 같은 절대고수.
그런데 제가 좋아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시장통에서 국수를 말고 있는 허름한 노인.
산속에서 장작을 패는 백발의 노인.
객잔 구석에서 졸고 있는 이름 없는 늙은이.
주인공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그 노인이 젓가락 하나 툭 던졌는데 상대의 칼이 날아가 버립니다.
그제야 알게 됩니다.
‘아, 고수였구나.’
진짜 고수는 꼭 무림의 한복판에 있지 않았습니다.
변방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제가 만나러 온 William도 어쩌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고수, William
William은 백인 테너 가수입니다.
그의 아파트 창문 너머로는 영화와 방송 산업을 상징하는 건물들이 보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실제로 무대 위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했고,
박수를 받았고,
조명이 자신을 향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William을 만났을 때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아, 이분 참 멋있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얼굴에는 배우 같은 분위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좋았습니다.
제가 농담처럼 물었습니다.
“William, 아직도 노래하세요?”
그가 저를 빤히 바라봤습니다.
마치 제가 참 이상한 질문을 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Of course.”
당연하지.
그 한마디가 꽤 멋있었습니다.
고수에게 은퇴란 없는 모양입니다
William은 지금도 노래합니다.
교회에서 노래하고,
자선행사에 초청받으면 무대에 서고,
때로는 야외 음악회에서도 노래합니다.
젊었을 때처럼 큰 무대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관객 수도 예전보다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래 한 소절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세월이 목소리를 조금 가져갔을지는 몰라도,
평생 쌓아온 내공까지 가져가지는 못했다는 것을.
저는 방문간호를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의외로 많이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도 고수였습니다
한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였습니다.
벽에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었습니다.
“그림 좋아하시나 봐요?”
제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린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의 작품이 우표로 제작될 정도로 알려진 화가였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젊은 시절 영화감독이었고,
어떤 분은 사진작가였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도 만났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하루 종일 주식시장을 분석하는 할아버지도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할머니가 딸의 법률사무실에 매일 출근한다고 하기에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딸이 변호사인가 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딸만 변호사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 자신도 평생 법조계에서 일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분들이 자신의 이력을 현관문에 붙여놓고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니어 아파트에서는 그냥
302호 할머니,
417호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고수도 늙습니다
세월 앞에서는 천하제일고수도 별수 없습니다.
무릎이 아프면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고,
혈압이 높으면 약을 먹어야 하고,
넘어지면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합니다.
평생 수많은 사람을 지휘했던 사람이 손주뻘 되는 물리치료사 앞에서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 합니다.
평생 법정에서 논리를 펼치던 사람이 젊은 간호사에게 팔을 내어줍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 혈관이 잘 안 보입니다.
한 번.
실패.
“Sorry.”
두 번째.
또 실패.
“정말 죄송해요.”
신출내기 간호사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힙니다.
그런데 오히려 환자가 말합니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 가끔 생각합니다.
아, 이게 진짜 내공이구나.
진짜 고수는 칼을 함부로 뽑지 않는다
젊을 때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지.
그런데 정말 많은 세월을 살아낸 사람 중에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왕년에 내가 누군지 알아?”
하지 않습니다.
조금 서툰 젊은 사람을 기다려주고,
실수하면 그냥 웃어주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도 “Thank you”라고 말합니다.
무협지에서 진짜 고수는 칼을 함부로 뽑지 않습니다.
칼을 뽑지 않아도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비슷한가 봅니다.
“William, 한 소절만 해봐요”
간호를 마치고 가방을 챙기다가 제가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William, 한 소절만 해봐요.”
그가 웃었습니다.
“지금?”
“네. 관객 한 명 있잖아요.”
William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반주도 없었습니다.
마이크도 없었습니다.
조명도 없었습니다.
객석에는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소절이 나오는 순간,
저는 가방을 챙기던 손을 멈췄습니다.
방금 전까지 그곳은 혈압을 재고 약을 확인하던 작은 시니어 아파트였습니다.
그런데 몇 초 만에 공연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래가 끝났습니다.
저는 혼자 박수를 쳤습니다.
짝짝짝.
William이 허리를 살짝 숙였습니다.
진짜 무대에서 인사하듯이.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습니다.
“제니, 내 혈압은 괜찮아?”
저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네. 고수님, 오늘 혈압도 좋으십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방문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아까 그 백발의 할머니는 아직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곡이 흘러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오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우편물을 챙겼고,
누군가는 워커를 밀며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저 평범한 시니어 아파트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저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는 할머니는 젊은 날 무엇을 했을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저 사람에게도 내가 모르는 전성기가 있었겠지.
우리는 늙은 사람을 만나면 자꾸 지금의 모습만 봅니다.
워커.
보청기.
약봉지.
굽은 허리.
느려진 걸음.
하지만 그 모습만 보고 한 사람의 인생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입니다.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으니까요.
피아노 곡이 끝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박수를 쳤습니다.
백발의 할머니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는 살짝 고개를 숙였습니다.
할머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은 필요 없었습니다.
무협지식으로 말하자면,
고수끼리 주고받는 짧은 목례쯤 되었을까요.
물론 저는 고수가 아닙니다.
오늘도 혈압계를 들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는 방문간호사일 뿐입니다.
다만 운이 좋아,
세월이라는 강호를 오래 건너온 고수들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날 시니어 아파트를 나오는데 등 뒤에서 다시 피아노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그냥 걸어갔습니다.
고수는 자신의 이름을 설명하지 않았고,
저도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한 곡이면 충분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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