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제니할매 이야기 '언덕 위의 하얀 집, 평화와 느림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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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하얀 집, 평화와 느림이 있는 곳
말기암 어머니와 딸이 가르쳐준 천천히 사는 법
방문간호를 하다 보면 정말 많은 집을 다닙니다.
말리부 해변을 바라보는 저택에 들어갈 때면 집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포도밭 한가운데 장난감처럼 앙증맞게 지어놓은 작은 집도 있었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집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여기서 어떻게 매일 살지?”
나는 운전대를 붙잡고 혼잣말을 하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태연합니다.
사람은 어디에서든 자기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모양입니다.
나는 주로 LA의 시니어 아파트를 다닙니다. 가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10층, 15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날만 빼면 이제는 복도 냄새까지 익숙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곳으로 갑니다.
언덕 위의 하얀 집
오늘 만날 환자는 멜리사의 어머니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생활하셨지만 병이 깊어지면서 딸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LA 외곽으로 빠져나가자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오래된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우거져 있고, 집들은 널찍한 간격을 두고 언덕을 따라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하얀 집 한 채가 보였습니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집이었습니다.
담장 한쪽에는 대나무가 빼곡하게 자라 자연스럽게 울타리가 되어 있었고, 작은 이구아나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랐는지 마당을 촐싹거리며 가로질러 달아났습니다.
나는 웃음이 났습니다.
“녀석, 여기가 네 집이냐?”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렸습니다.
멜리사였습니다.
손에는 뜨개질하던 실이 그대로 들려 있었습니다.
“Hi, Jenny. Come in.”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닮은 모녀
방 안에는 어머니가 누워 계셨습니다.
말기 위암 환자.
차트에서 먼저 읽었던 진단명은 무거웠지만, 막상 만난 어머니의 얼굴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달랐습니다.
평온했습니다.
그리고 멜리사가 침대 옆에 앉는 순간 나는 피식 웃었습니다.
“두 분 정말 많이 닮았네요.”
어머니도 웃고, 멜리사도 웃었습니다.
눈매도 닮았고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도 닮았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같은 표정이 있었습니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의 얼굴.
멜리사는 어머니 곁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뜨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간병한다고 계속 말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해드려야 한다며 부산하게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같은 방에 함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눈을 감으면 멜리사는 책장을 넘겼고, 어머니가 눈을 뜨면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요.”
집 안을 둘러보니 벽 한쪽에 페인트칠이 덜 끝난 곳이 보였습니다.
“공사 중이에요?”
내가 묻자 멜리사가 웃었습니다.
“아니요. 제가 칠하고 있어요.”
“직접요?”
“시간 날 때 조금씩요.”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요.”
별것 아닌 말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오래 귀에 남았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오늘 안에 끝내려고 애쓰며 사는지요.
빨리 먹고, 빨리 일하고, 빨리 운전하고, 빨리 대답하고….
심지어 아픈 사람을 돌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음 일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흘렀습니다.
페인트칠도 천천히.
뜨개질도 천천히.
책장도 천천히.
아픈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도 천천히.
어쩌면 멜리사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서둘러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딸이 떠준 담요
혈압을 확인하고 몇 가지 상태를 살피고 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자신의 담요를 손으로 만지셨습니다.
“예쁘지요?”
부드러운 색의 뜨개 담요였습니다.
“아주 예쁘네요.”
그러자 어머니가 살짝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딸이 만들었어요.”
목소리에 자랑이 가득했습니다.
나는 담요를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실 한 코, 한 코를 이어 완성했을 그 시간을 생각했습니다.
아마 멜리사는 어머니 옆에 앉아 수없이 실을 감았을 것입니다.
한 줄을 뜨고,
또 한 줄을 뜨고,
어머니가 잠들면 다시 몇 코를 뜨고….
담요 한 장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담요는 어머니의 몸을 덮고 있었습니다.
비싼 물건도 아니고 특별한 치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담요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조금 천천히 문을 닫았습니다
방문을 마치고 가방을 챙겼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어머니가 손을 살짝 들어 인사하셨습니다.
멜리사는 다시 뜨개질을 들고 어머니 옆에 앉았습니다.
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는 딸이 만들어준 담요를 덮고 있었고, 멜리사는 창가에서 조용히 뜨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나무 잎 사이로 오후 햇빛이 흔들렸습니다.
조금 전 그 이구아나 녀석이 또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갔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바빴습니다.
내 휴대전화에는 다음 환자의 주소가 떠 있었고, 나는 또 차를 몰고 복잡한 LA 거리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시동을 바로 걸고 싶지 않았습니다.
잠시 차 안에 앉아 언덕 위의 하얀 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집에는 말기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분명 슬픔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고, 밤이면 딸 혼자 삼키는 눈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내가 그 집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죽음도, 병도 아니었습니다.
평화였습니다.
삶에는 빨리 해결해야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빨리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더 열심히 달리는 힘이 아니라, 오늘 못한 것은 내일 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습니다.
백미러 속 하얀 집이 조금씩 작아졌습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제니야.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
그날 다음 환자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만큼은
나도 멜리사처럼 조금 느리게 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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