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제니할매 이야기 '이름은 잊어도 사랑은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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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잊어도 사랑은 기억한다
알츠하이머 아내와 함께 늙어가는 남편의 이야기
LA 다운타운에는 시간이 겹쳐 사는 곳들이 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유리 빌딩 아래로 100년 가까운 세월을 버틴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 있고, 한때 여행객들로 북적이던 호텔 가운데 일부는 이제 시니어 아파트가 되어 노인들의 마지막 삶터가 되었습니다.
콘서트홀과 미술관, 극장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웃고 박수를 칩니다.
그리고 그 화려한 거리 한쪽, 오래된 시니어 아파트에는 김 엘리사벳 할머니와 남편이 살고 있습니다.
두 분을 처음 만난 것은 몇 년 전 시니어 데이케어 센터에서였습니다.
밥 한 숟가락에 담긴 세월
그날 점심시간이었습니다.
마르고 곱게 생긴 할머니 옆에 남편이 바짝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밥 한 숟가락을 떠서 반찬을 조금 올리고는 아내의 입 앞으로 가져갔습니다.
“여보, 이것만 먹어.”
할머니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한 입만. 응?”
아기를 달래듯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할머니가 겨우 입을 벌렸습니다.
제가 옆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혼자 드실 수 있도록 조금 기다려보시면 어떨까요?”
할아버지는 멋쩍게 웃었습니다.
“간호사 양반, 기다리다가는 해 져요. 이렇게라도 안 먹이면 하루 종일 굶어요.”
웃으며 하신 말이었지만 저는 그 손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평생 누군가에게 밥을 얻어먹었을지도 모를 남자가 이제는 늙은 아내의 입에 한 숟가락씩 밥을 넣어주고 있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늙는다는 건 어쩌면 이런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 이름은 잊었는데 춤은 기억했다
엘리사벳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 이름이 하나둘 사라졌고 가족도 낯선 사람처럼 바라볼 때가 있었습니다. 센터 프로그램에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딱 하나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라인댄스 시간이었습니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조금 전까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첫 박자가 시작되는 순간,
발이 움직였습니다.
하나, 둘, 셋.
몸이 리듬을 탔습니다.
손끝이 살아났고 허리가 펴졌습니다.
80대 중반의 노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젊은 무용수가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한국의 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했고, 방송국에서 안무를 담당할 만큼 평생 춤과 가까이 살았던 분이었습니다.
남편의 이름도 잊고 자식의 얼굴도 희미해져 가는데,
춤은 잊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내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순간 할아버지의 눈에는 치매에 걸린 여든 살 아내가 아니라, 오래전 자신이 사랑했던 젊은 여자가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년 뒤 다시 찾아간 집
시간이 흐른 뒤 방문간호사로 다시 그 집을 찾았습니다.
엘리사벳 할머니는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곁에 있었습니다.
집 안은 조용했고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할머니의 이불 끝에 걸려 있었습니다.
저는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오래전에 본 영화 《The Notebook》을 떠올렸습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에게 남편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어주는 영화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아내가 아주 잠깐 남편을 알아보지만 그 기억은 다시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영화를 볼 때는 참 슬픈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 할머니의 침대 곁에 서 있으니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기억해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름은 사라져도 남는 것
알츠하이머병은 참 잔인합니다.
사람의 기억을 한꺼번에 가져가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씩 가져갑니다.
어제 일을 잊게 하고,
익숙한 길을 낯설게 만들고,
마침내 평생 함께 산 사람의 이름까지 흐릿하게 만듭니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저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도 보았습니다.
말을 거의 하지 않던 분이 오래된 찬송가나 가요를 따라 부르고,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던 분이 익숙한 손길에는 편안하게 눈을 감기도 합니다.
엘리사벳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머리로는 잊었어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누군가 내 손을 잡았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것.
이유는 모르지만 그 사람 곁에서는 두렵지 않은 것.
그런 것도 사랑의 기억이 아닐까요.
오늘도 남편은 밥을 떠준다
제가 돌아가려는데 할아버지가 아내의 이불을 한 번 고쳐 덮어주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손길이었습니다.
영화처럼 음악이 흐르지도 않았고 감동적인 말도 없었습니다.
그저 수십 년을 함께 산 사람이 잠든 사람의 발끝에 이불을 덮어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그 장면이 오래 남았습니다.
젊은 날에는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했을 두 사람.
이제 한 사람은 그 말을 잊었고, 다른 한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밥을 떠먹이고,
약 먹을 시간을 챙기고,
밤이면 이불을 덮어줍니다.
어쩌면 늙은 부부의 사랑은 그렇게 말에서 손으로 옮겨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습니다.
복도로 나오니 어디선가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지금 잠든 엘리사벳 할머니의 꿈속에도 음악이 흐르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치매도 없고 늙음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젊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서로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저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천천히 춤추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은 잊어도, 사랑은 어쩌면 몸과 마음 어딘가에서 마지막까지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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