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제니할매 이야기 '못 떠나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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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떠나는 배 — 끝난 인연인데 왜 자꾸 뒤를 돌아볼까
사람은 이상합니다.
떠나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은 오래 그 자리를 맴돕니다.
사랑해서일 수도 있고, 미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를 걱정하며 살아온 탓에 걱정하지 않는 법을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평소 즐겨 듣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24년 동안 남편과 지긋지긋하게 싸우다 결국 이혼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혼하고도 아이들 때문에 한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전남편이 걱정되고, 겨울이 다가오니 김장도 해놓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스님의 대답은 짧았습니다.
“왜 남의 남자를 걱정해요?”
청중은 웃었습니다.
저도 웃었습니다.
그런데 웃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찔렸습니다.
24년 동안 남편이었던 사람이 도장 하나 찍었다고 하루아침에 ‘남의 남자’가 될 수 있을까요.
법으로는 끝났어도 마음에는 아직 짐이 남아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가끔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Joseph Davis Jr.
15년째 작은 돌봄 시설에서 살고 있는 남자입니다.
이름 뒤에 붙은 ‘Jr.’
Joseph을 처음 만난 곳은 미국의 한 작은 보딩케어 시설이었습니다.
커다란 요양원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집처럼 생긴 곳이었습니다. 거실에는 오래된 소파가 놓여 있었고, 부엌에서는 점심 준비하는 냄새가 났습니다.
Joseph은 창가 가까운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당뇨 합병증 때문에 방문한 환자였지만, 혈당과 약 이야기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그의 지난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여기 산 지 얼마나 되셨어요?”
“15년.”
짧은 대답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Joseph Davis Jr.
아버지는 사업가였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니 ‘Jr.’라는 두 글자 안에는 한때 가족의 기대도, 자부심도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Joseph 역시 젊은 시절에는 사업을 했습니다.
아내가 있었고 아이들이 있었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풍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무너지는 데 반드시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제까지 직접 운전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누군가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게 되고, 가족을 책임지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하루를 보내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Joseph도 그랬습니다.
재활병원을 오가는 동안 사업은 무너졌고 재산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지금의 시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15년.
강산이 한 번 반이나 바뀔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와요”
제가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주 와요?”
그 순간 Joseph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습니다.
“크리스마스하고 Father's Day에는 와요.”
말은 담담했지만 그는 아이들이 오는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일 년 365일 가운데 그 며칠이 Joseph에게는 아주 큰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내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부인은요?”
Joseph이 피식 웃었습니다.
“한 번도 안 왔어요. 이혼했어요.”
저도 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시설 직원이 뜻밖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전 부인은 이곳으로 찾아오지는 않지만 가끔 시설 관리자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Joseph은 밥 잘 먹어요?”
“요즘 아픈 데는 없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잠시 Joseph을 바라보았습니다.
찾아오지는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밥은 먹었는지 묻는 사람.
아프지는 않은지 궁금해하는 사람.
도대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부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남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이상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이혼서류가 없다
간호사로 오래 일하다 보니 참 별별 관계를 만납니다.
죽도록 미워한다면서 병원에는 제일 먼저 달려오는 자식이 있고, 평생 싸웠다면서 배우자가 입원하면 밤새 의자에서 지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면서도
“밥은 먹었대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가 봅니다.
서류에는 관계를 끝내는 칸이 있지만, 마음에는 그런 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연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Joseph의 전 부인도 그랬을까요.
15년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말만 들으면 냉정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가끔 전화를 걸어 그의 안부를 묻습니다.
어쩌면 그녀 역시 자기 인생을 살기 위해 떠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함께 살았던 세월까지 지울 수는 없었겠지요.
그날 시설을 나오며
방문을 마치고 혈당 기록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Joseph, 다음에 또 봐요.”
그가 손을 들어 인사했습니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는데 오후 햇빛이 유난히 길게 주차장 위로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차에 올라타면서 문득 법륜스님의 그 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남의 남자를 왜 걱정해요?”
참 명쾌한 말인데, 인생은 그 한마디처럼 명쾌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배에서 내렸다고 해서 함께 건넜던 바다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떤 사람은 떠난 뒤에도 가끔 뒤를 돌아봅니다.
잘 살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글쎄요,
그저 한때 같은 배를 타고 긴 바다를 건넜던 사람에 대한 마지막 정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시동을 걸었습니다.
백미러 속으로 Joseph이 사는 작은 집이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그날따라 백미러라는 물건이 참 묘하게 느껴졌습니다.
뒤를 보기 위해 달려 있지만,
자동차는 결국 앞을 향해 가라고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우리 인생도 아마 그렇겠지요.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까지는 괜찮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바라보느라
내가 가야 할 길까지 멈추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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