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제니할매 이야기 '약이 밥보다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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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간호사가 약통을 먼저 보는 이유
“제니 간호사, 밥은 한 공기인데 약은 두 공기야.”
80대 할머니가 식탁 위를 가리키며 웃으셨습니다.
저도 따라 웃다가 약통을 보고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아침 약.
점심 약.
저녁 약.
자기 전 약.
요일별 약통을 펼쳐 놓으니 작은 알약들이 줄을 맞춰 앉아 있었습니다.
“이게 다 드시는 거예요?”
“그럼. 의사가 먹으라는데 먹어야지.”
하나씩 살펴봤습니다.
혈압약.
당뇨약.
관절약.
위장약.
변비약.
수면을 돕는 약.
거기에 비타민과 건강식품까지 있었습니다.
할머니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밥보다 약이 많아 보였습니다.
병원에 갈 때마다 하나씩 늘어난 약
방문간호를 하다 보면 아주 익숙한 풍경이 있습니다.
식탁 한쪽에 놓인 약봉투들입니다.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갔다가 약을 받고,
속이 쓰려 또 다른 약을 받고,
잠이 안 와 약 하나가 더 생기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환자도 자신이 무슨 약을 왜 먹는지 헷갈립니다.
제가 묻습니다.
“이 약은 왜 드세요?”
그러면 잠시 약병을 들여다보다가 대답하십니다.
“글쎄… 의사가 먹으라니까 먹지.”
그 말을 들으면 저는 약 이름보다 먼저 그분의 표정을 봅니다.
자신의 약인데도 너무 낯선 얼굴입니다.
“병보다 약이 날 괴롭혔네.”
한 번은 계속 어지럽다는 할아버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휘청거렸고, 걷다가 벽을 짚기도 했습니다.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지만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약 좀 볼까요?”
식탁 위에 약병을 하나씩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혈압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로 다른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임의로 약을 빼지 않고 주치의에게 전체 복용약을 확인하도록 연결했습니다.
약을 다시 정리하고 얼마 뒤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할아버지가 현관까지 걸어 나오며 말씀하셨습니다.
“제니, 요즘 덜 어지러워.”
그러더니 약통을 한번 바라보고는 웃었습니다.
“병보다 약이 날 괴롭혔네.”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사람을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약통 안에는 그 사람의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방문간호를 가면 약통을 꼭 봅니다.
그 안에는 단순히 알약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 전 병원에서 받은 약.
이제는 먹지 않는 약.
한 번 먹어보고 남겨둔 약.
좋다고 해서 사놓은 영양제.
이웃이 권한 건강식품.
가끔은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의 이름이 적힌 약병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건 왜 아직 가지고 계세요?”
“아까워서.”
그 말도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약은 옷이나 그릇처럼 아깝다고 그냥 보관해둘 물건은 아닙니다.
특히 여러 병원을 다니거나 여러 약을 함께 먹는 어르신이라면, 현재 무엇을 먹고 있는지 의료진이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도 약이에요?”
어르신들은 비타민이나 건강식품을 보여드리면서 자주 말씀하십니다.
“이건 약 아니야. 그냥 비타민이야.”
“친구가 좋다고 줬어.”
“천연이라 괜찮대.”
그럴 때 저는 처방약 옆에 그것들도 같이 놓습니다.
“이것도 의사나 약사한테 보여드리세요.”
몸 안에서는 처방약만 따로 일하고 건강식품만 따로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모두 보여주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래서 저는 환자분들에게 복잡한 설명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병원 갈 때 약통째 들고 가세요.”
영양제도 함께요.
약을 줄이는 것도 혼자 하면 안 됩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혈압 괜찮으니까 이 약 끊었어.”
“이제 안 아파서 안 먹어.”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습니다.
약이 많다고 걱정해서 아무 약이나 빼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필요 없는 약은 정리해야 하지만, 어떤 약을 줄이고 끊을지는 의사나 약사와 함께 결정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약을 많이 먹지 마세요”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 먹는 약 중에 왜 먹는지 모르는 약 있어요?”
그 질문에서 약 정리가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다시 그 할머니 집에서
처음 “밥은 한 공기, 약은 두 공기”라고 말했던 할머니 댁에 다시 갔습니다.
식탁에는 여전히 약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단정했습니다.
복용 중인 약만 따로 정리해두고, 병원에 갈 때 보여줄 약 목록도 옆에 놓아두셨습니다.
“이제 약 이름 좀 아세요?”
제가 물었더니 할머니가 자신 있게 약통 하나를 들었습니다.
“이건 혈압.”
또 하나를 들었습니다.
“이건 당뇨.”
그리고 마지막 병 앞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이건…”
저를 쳐다봤습니다.
“제니, 이건 뭐였지?”
둘이 한참 웃었습니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약 이름을 전부 외우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한 번쯤 들여다보고,
모르면 물어보고,
필요 없는 약은 의료진과 함께 정리하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집을 나서는데 할머니가 식탁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제니, 약이 아직 밥보다 많아.”
저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밥은 꼭 챙겨 드세요.”
할머니가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문을 닫았습니다.
약통은 여전히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그 약들이 전보다 조금 덜 무거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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