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제니할매 이야기 '600만 불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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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만 불의 사나이, 그래도 아직은 청춘입니다
간이식과 뇌졸중을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
“간호사님, 우리 남편이요?”
부인이 방문을 열어주며 빙긋 웃었습니다.
“600만 불의 사나이예요.”
“네?”
저도 모르게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을 한번 쳐다봤습니다.
박 토마스 씨, 70세.
어제 재활병원에서 퇴원해 막 집으로 돌아온 환자였습니다.
부인이 다시 말했습니다.
“병원에서 들어간 돈 생각하면 600만 불도 넘을걸요?”
그제야 저도 웃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TV에서 보았던 미국 SF 드라마가 떠올랐습니다.
사고로 크게 다친 남자를 엄청난 돈을 들여 다시 살려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만든 이야기.
저도 농담을 받았습니다.
“600만 불이요? 그 이상일 텐데요.”
부인이 깔깔 웃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던 박 씨도 입꼬리를 살짝 올렸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 농담 속에 얼마나 긴 세월이 들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진단명만 한 페이지였습니다
전날 받아본 박 씨의 의료기록은 두툼했습니다.
간경화.
간이식.
뇌졸중.
편마비.
언어장애.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여러 진단명과 약 이름들.
진단코드만으로도 한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저는 서류를 내려놓고 박 씨를 바라봤습니다.
종이 위에서는 중증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말은 조금 느렸지만 또박또박 말씀했습니다.
“간호사님… 저 아직 괜찮아요.”
그 말을 듣는데 저도 모르게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그리고 손을 잡았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청춘입니다.”
박 씨가 웃었습니다.
옆에서 부인이 말했습니다.
“저 양반은 평생 자기가 청춘인 줄 알아요.”
이번에는 셋이 함께 웃었습니다.
세 형제의 간에 남겨진 흔적
이야기를 나누다 박 씨의 가족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박 씨는 삼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두 형제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세 형제 모두 어린 시절부터 B형간염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은 어머니로부터의 주산기 감염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박 씨 역시 오랜 세월 간질환을 관리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결국 간경화가 심해졌습니다.
형제 둘을 먼저 보내고 난 뒤였으니,
본인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하지만 박 씨는 그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천장을 바라보다 짧게 말했습니다.
“나도 형들처럼 되는 줄 알았지.”
그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씨에게 새로운 간을 받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누군가의 마지막이 나의 두 번째 삶이 되었습니다
간이식.
짧은 세 글자지만 그 안에는 참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기다림이 있고,
큰 수술이 있고,
회복이 있고,
이식 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관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장기가 있어야 가능한 수술입니다.
박 씨에게도 그렇게 두 번째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수술은 끝났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며 감염과 거부반응을 조심해야 했고, 수많은 검사와 진료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견뎠습니다.
병원을 들락날락하면서도 견뎠고,
약이 늘어나도 견뎠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그때 박 씨 부부는 생각했을 겁니다.
‘이제 큰 산 하나 넘었구나.’
그런데 인생은 가끔 산 하나를 넘었다고 평지를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2년 뒤, 또 하나의 파도가 왔습니다
간이식 후 약 2년이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뇌졸중이 찾아왔습니다.
한쪽 팔과 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말도 예전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혼자 걷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다시 병원.
다시 재활.
다시 기다림.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고 박 씨는 어제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간 그날은 단순한 첫 방문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이 또 한 번 살아서 자기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이었습니다.
600만 불의 사나이 집에는 사람들이 계속 찾아왔습니다
박 씨가 집에 돌아왔다고 치료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집이 작은 재활병원이 되었습니다.
제가 다녀가면 물리치료사가 왔습니다.
굳어진 다리와 팔을 움직였습니다.
작업치료사는 혼자 옷을 입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연습시켰습니다.
언어치료사는 박 씨의 말을 기다려주었습니다.
홈헬스 에이드는 씻는 일을 도왔고,
사회복지사는 앞으로 필요한 도움을 알아보았습니다.
각자 들고 오는 가방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바라보는 곳은 같았습니다.
침대에서 의자로.
의자에서 워커로.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동작 하나가 이제는 하루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가장 비싼 사람은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방문하면서 제가 발견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박 씨에게 가장 오래 붙어 있는 사람은 의사도,
간호사도,
치료사도 아니었습니다.
부인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약을 챙겼습니다.
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남편이 말을 더듬으면 대신 말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워커를 잡고 일어서면 뒤에서 가만히 지켜봤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힘드시죠?”
부인은 손사래를 쳤습니다.
“뭐가 힘들어요. 살아 있으니까 하는 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에는 피곤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쳐다보자 금세 웃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간호사 다 됐어.”
박 씨가 힘겹게 대답했습니다.
“월급… 줄게.”
“얼마?”
“600만 불.”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도 따라 웃었습니다.
“그럼 제가 증인이에요. 꼭 받으세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청구서
미국에서 간이식이나 장기간의 중환자 치료를 받으면 의료비 규모가 매우 커질 수 있습니다.
물론 병원 청구액과 환자가 실제 부담하는 금액은 전혀 다를 수 있고, 보험 종류와 보장 내용에 따라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 씨의 실제 치료비가 얼마였는지는 모릅니다.
600만 달러인지,
그보다 적은지,
더 많은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병원비 명세서에는 나오지 않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형제를 먼저 보내고도 버텨낸 시간.
이식받을 간을 기다리던 시간.
수술실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을 부인의 시간.
뇌졸중 뒤 처음 발을 움직였던 순간.
그리고 다시 자기 집 침대에 누울 수 있게 된 어제.
그런 것에는 가격표를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청춘입니다”
방문을 마치기 전 박 씨의 혈압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괜찮았습니다.
청진기를 정리하고 있는데 박 씨가 저를 불렀습니다.
“간호사님.”
“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다렸습니다.
한참 뒤 박 씨가 물었습니다.
“나… 걸을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제가 쉽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간호사는 희망을 주어야 하지만,
할 수 없는 약속까지 해서는 안 되니까요.
그래서 저는 워커를 바라보다 말했습니다.
“오늘보다 내일 한 걸음 더 가보는 거죠.”
박 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인이 옆에서 말했습니다.
“당신 들었지? 내일부터 운동이야.”
박 씨가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내일부터?”
“오늘부터.”
이번에도 부인이 이겼습니다.
현관을 나서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방 안에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자, 한번 일어나봐요.”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는 무슨.”
저도 모르게 웃었습니다.
잠시 뒤 워커가 바닥을 짚는 소리가 났습니다.
툭.
그리고 한참 후,
다시 툭.
저는 현관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습니다.
600만 불의 사나이가 걷고 있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한때는 아무 생각 없이 걸었을 두 걸음을,
이제는 온몸의 힘을 모아 걷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천천히. 내가 여기 있어.”
저는 조용히 문을 닫았습니다.
그날 집을 나오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청춘이라는 것이 꼭 젊은 몸을 말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일흔 살.
간이식.
뇌졸중.
편마비.
진단명만 읽으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다음 한 걸음을 내딛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복도 끝까지 걸어가는데 뒤에서 다시 워커 소리가 들렸습니다.
툭.
잠시 후,
툭.
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혼자 웃었습니다.
그래요, 박 선생님.
아직은 청춘입니다.
※ 이 글은 방문간호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에세이이며, 간이식·뇌졸중 및 재활치료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치료 과정과 예후가 다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치료와 재활에 관한 판단은 담당 의료진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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